2011년 10월 31일

재생중 2011. 11. 1. 00:02 |
1.
드라마 스페셜 - 아내의 숨소리

어제 봤던 드라마스페셜 아내의 숨소리 다시 보는 중... 다시 봐도 좋다. 정말 강추...
"니 숨소리도 듣기 싫어"라는 대사는 너무 슬프네.
이별의 순간... 이별의 말에 대답은 필요없다. 사랑은 늘 함께. 이별은 늘 혼자.
뻔한 스토리에 진부할 수도 있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한번은 가졌을 감정과 기억들.
지금 이순간 소중한 사람은 누구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더 현명한가 고민해본다.
지나간 사랑 또는 권태에 빠져있는 이들에게...


사랑은 왜 늘 변하는 걸까...
어떻게 해야 잘 할 수 있나 자꾸 고민하지만 언제나 오답.
그래도 그냥 마음가는대로 살련다... 있을 때 잘하자.


사랑은 사람을 아프게 한다. 시작할 때는 두려움과 희망이 뒤엉켜 아프고 시작한 후에는 그 사람의 마음을 모두 알고 싶어서 부대끼고 사랑이 끝날 땐 그 끝이 같지 않아서 상처받는다 그리하여 사랑은 늘 사람을 아프게 한다. -연애시대-


최자혜 너무 예쁘고 불쌍하게 나와서 호감 급상승했는데....
품절녀라는 걸 좀전에 알았다. 속상하네. 이유없이....
내마음속에서 삭제했다. 난 차가운 도시남자. 풉.


2.
이용아저씨가 부른 잊혀진 계절을 하루 종일 흥얼거리게 만드는 시월의 마지막 밤.
2년전 오늘 친구를 만났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1년전 오늘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1년을 단위로 내머릿속 기억들을 살펴보면 나이를 먹을수록 기억되는 것이 없다.
점점 불행해지는 것인지... 더이상 나에겐 특별한 것들이 없어졌는지...
아니면 나의 시간들이 줄줄 새어나가고 있는 것인지...


그 주의 마지막... 그 달의 마지막 날. 늘 다짐한다. 늘 다짐하는 것은 늘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시 다짐한다. 바래어본다.


11월이 되면 나좋다고 죽자사자 쫓아다니는 모기도 떠날 것이고...
12시마다 내곁에 있어주던 라디오천국과 심야식당도 떠난다. 바이바이...
만남이 있기에 이별이 있나 이별이 있기에 만남이 있나


3.
야~~~!! 이 바보 똥개 멍충아!!!!!

가끔은 숨이 막힐듯한 이런 포옹은 부담스러
산책을 하는건 좋지만 목걸이는 좀 빼고싶어

꼬리를 흔들어 주는건 네가 육포를 들었기 때문에
생각처럼 모든 시간에 네가 반가운건 아니야

바보 똥개 멍충아 - 뭐라고
바보 똥개 멍충아
바보 똥개 멍충아 - 내게 말한걸까

전화를 내려놓은 너의 이런 포옹은 부담스러
울고있는 네가 불쌍해 이번만 참아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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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23일 GMF

재생중 2011. 10. 24. 00:28 |

처음 본 칵스를 콕스라고 두번트윗...한번은 RT도 되고...쪽팔려라...이놈의 시끼들 때문에 귀가 얼얼. 사운드가 공격한다. 무서웠다. 부르는 가수도 듣는 관객도...
귀여운 일본아저씨들 데파페페 캄사하므니다~~
김도향할아버지의 씨엠쏭메들리 최고!!! 정박과 엇박의 마법사. 음정도 마음대로~~ 멋진 어르신!!!!
김씨아저씨의 빈티에 깝놀 근데 완전 멋져서 더 깝놀. 막곡 부르다가 체조경기장 무너지는 줄 알았네.
스윗소로우 좀 더 흥해라. 계속 못 떠서 아쉽네...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너를" 진짜 명곡.
이적 노래방에서 연속으로 세곡 부르면 한타임 쉬는 게 예인데... 도대체 몇곡을 한숨에 부르는지... 이적 만쉐~~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앵콜곡 하늘을 달리다를 모든 사람들이 날뛰며 불렀다.

오늘 난 다시금 현대인이 얼마나 삶에 찌들었는지 알았다. 놀아보겠다고 바글바글 모인 사람들....다 잘 뛰고 미친듯이 놀고.

간만에 광합성도 하고 바람도 쐬고 비도 맞고 이야기도 하고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먹고 마시고... 즐거운 하루~!!
판피린 한병 원샷... 어제 공연 볼 생각에 떨려서 잠을 거의 못 잤네. 운동을 해서 그나마 버티고 논 거다.
이 커다란 즐거움과 기쁨 뒤에 오는 공허함은 나만의 숙제.


아 피곤해서 더이상 못 쓰것다....멍~~ 대충 여까지 쓰고 다시 고치든 던져놓든 이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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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17일

재생중 2011. 10. 17. 05:27 |
1.
눈을 뜨니 새벽 4시가 조금 넘었다.
살짝 열어놓은 창문틈으로....
조그맣게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며칠전 새벽에도 나를 놀래키던 그 울음소리.
왜 자꾸 무섭게 새벽에 우세요...
총각이 무서워합니다...굉.장.히.

한번은 오전마다 옆집에서 중얼중얼 주문 외우는 소리가 들렸다.
성경을 암송하나... 아닌데. 접신인가... 정신분열증!!!
이 동네 미친사람 많네.
3일쯤 되서 알았다. 인터넷동영상강의 배속재생이였다.
총각이 무서워합니다. 배속 적당히.

아침이라고 울리는 알람소리... 배꼽알람. 밥주세요~
최대한 작은 동작으로 재쌉게 옷을 입고
살금살금 집을 빠져나와 새벽거리로~~

저 멀리 계신 아저씨가 반갑게 내게 뛰어온다.
"롯데백화점이 어느 쪽이에요?"
"저 쪽 큰길로 가셔서 이 쪽으로 돌아서 쭉 가세요~"
땀을 뻘뻘 흘리시며 부리나케 사라지는 대리운전기사아저씨의 뒷모습은 서글프다.

순대국집에 들어가니
이 새벽에 입맛 땡기는 사람들이 많아 다행이다.
나처럼 눈 뜨자마자 순대국 먹으러 온 사람이 없지만...
아주머니는 뚝배기를 불위에 올려놓고 박수를 치신다.
짝짝짝~ 짝짝짝~~
박수 받은 뚝배기는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밥 쳐먹으니께 경제는 꼭 살려라잉~ 알것냐~~" MB국밥집 할머니는 말씀하셨지... 우리집경제 살릴게요.


2.

오랫만에 받은 청첩장. 너무 예쁘다.^^

사랑은 얄미운 나비라던데 휙~ 잡아챘네!!


3.

천국의 아침 (Feat. 이상순) - 손성제 비의 비가


바스락 바스락
달그락 달그락
나를 깨우는 작은 소리

오늘 아침도 넌 먼저 눈을 떠서
내가 깨지 않게 조심 조심 하루를 시작하고...

이런 아침이 난 아직 꿈 같아서
그냥 눈을 감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혹시 어딘가에 천국이 있다면
그곳은 아마 이런 곳일 거야
이렇게 너의 고운 숨소리에 눈을 뜨는 아침
꿈이라면 깨어나지 않기를...

바스락 바스락
달그락 달그락

들을수록 슬퍼지는 노래.
꿈이야 이제 그만 깨어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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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9일

재생중 2011. 10. 10. 22:48 |
1.

손성제 쇼케이스...
지금까지 봤던 그 어떤 공연보다 좋았다.
손성제라는 이름만 안 것이 채 한달도 안 되고 음악은 한번도 들어본 적도 없는 이의 공연에서...
이렇게 크게 감동하리라곤 생각 못했다.
살면서 이런 공연을 몇번이나 볼 수 있을까...
노래의 멜로디, 가사, 사운드, 다양한 악기들의 연주... 손성제, 박창학, 뽐므, 박신애, 박아셀...보컬들의 목소리.
공연을 단순히 보고 들었다가 아닌 경험했다.
중간중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고...
마지막 앵콜곡에서 "어느 날"을 부르던 손성제씨가 울기 시작하자 객석은 눈물마다가 됐다.
어제의 모습과 소리와 그 감동, 감정들이 조금씩 옅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며 시간이 흘러가는 걸 아쉬워하고 있다.


첫장을 넘기면 적혀 있는 글...


"사랑의 상처로 가슴 아파하는 당신에게..."


잠이 오지 않는 새벽 손성제의 "비의 비가"앨범을 들어보길...

지하철,버스,길한복판...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있을 때 손성제의 "비의 비가"앨범을 들어보길...


나에게 가장 소중한 앨범이 될 거 같다.


노래 들어보기... 아래 "더보기"를 눌러주세요.

2.

반짝반짝 빛나는 별... @작고 소박한 맥주집

모든 사랑과 이별은 다 비슷한가봐... 다시 빛나는 별 하나가 당신에게, 우리에게 나타나길.


3.

이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빨간 우체통...

누군가에게 우표를 붙인 편지를 써본 게 언제더라... 써본 적이 있던가? 아.. 군대..


4.
어제 오전에 무한도전 무한상사편을 봤다.
"그랬구나... 아.. 이제야 알겠다"
배를 잡고 깔깔거리며 봤는데...
생각할수록 슬프다.
얼마나 많은 오해와 대화의 단절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떠났고 떠나게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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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6일

재생중 2011. 10. 7. 00:25 |

영어원문출처 : http://news.stanford.edu/news/2005/june15/jobs-061505.html
한글해석출처 : 몰라요... 딱 마음에 들진 않지만 내가 하기는 싫고.....

편집하면서 다시 읽어봐도 좋은 내용이다.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Jobs says

This is a prepared text of the Commencement address delivered by Steve Jobs, CEO of Apple Computer and of Pixar Animation Studios, on June 12, 2005.

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먼저 세계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이곳에서 여러분들의 졸업식에 참석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태어나서 대학교 졸업식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네요. 오늘 저는 제 인생의 세가지 이야기를 해드리려고 합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저 세가지 이야기뿐입니다.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먼저 인생의 전환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So why did I drop out?

전 리드 칼리지에 입학한지 6개월만에 자퇴했습니다. 그래도 일년 반 정도는 도강을 하다가 정말로 그만뒀습니다. 왜 자퇴했을까요?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They said: "Of course."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이야기는 제가 태어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 생모는 대학원생 젊은 미혼모였습니다. 그래서 저를 입양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녀는 제 미래를 위해 대학을 나온 양부모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태어나자마자 변호사 가정에 입양되기로 됐었죠. 하지만 제가 태어난 순간에 여자 아이를 입양하기로 마음을 바꿨습니다. 대기자 명단에 있던 양부모들은 한밤중에 이런 전화를 받게 됩니다. "예정에 없던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입양하시겠습니까?" 양부모님은 대답했습니다. "물론이죠" 그런데 양어머니는 대졸도 아니고 양아버지는 고등학교도 안나와서 친어머니는 입양동의서 쓰기를 거부했습니다. 몇달 후 양부모님이 저를 대학까지 가르치겠다고 약속한 후에야 친어머니는 입양에 동의했습니다. 이것이 제 인생의 시작이었습니다.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17년후 저는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순진하게도 바로 이곳, 스탠포드의 학비와 맞먹는 값비싼 학교를 선택했습니다. 평범한 노동자였던 부모님이 힘들게 모아뒀던 돈이 모두 제 학비로 들어갔습니다. 6개월 후 대학생활은 그만한 가치가 없어 보였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또 대학교육이 그것에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 알 수 없었습니다. 양부모님들이 평생토록 모은 재산을 쏟아붇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잘 될거라고 믿고 자퇴를 결심했습니다. 당시에는 두려웠지만 되돌아 보았을 때 제 인생 최고의 결정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자퇴후엔 재미없던 필수과목들을 듣는 것을 그만두고 보다 더 흥미있어 보이는 강의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Let me give you one example:

그렇다고 꼭 낭만적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기숙사에서 머물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 집 마룻바닥에 자기도 했고 5센트짜리 콜라병을 팔아 끼니를 때우기도 했습니다. 일요일이면 단 한번이라도 제대로 된 음식을 먹기 위해 7마일을 걸어 하레 크리슈나 사원의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정말 맛있었습니다. 순전히 호기심과 직감만을 믿고 저지른 일들이 훗날 정말 값진 경험이 됐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드리죠.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당시 리드칼리지는 미국 최고의 서체 교육을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학교 곳곳에 붙어있는 포스터와 서랍에 붙어있는 상표들, 그림들... 손으로 아름답게 그린 서체 예술이었습니다. 정규과목을 들을 필요가 없었으므로 서체 수업을 들었습니다. 그때 저는 세리프와 산세리프체를, 다른 글씨의 조합간의 그 여백의 다양함을, 무엇이 위대한 글자체의 요소인지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것은 과학적인 방식으로는 도저히 표현해낼수 없는 아름답고, 유서깊고, 예술적으로 미묘한 것이어서 전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이중 어느 하나라도 제 인생에 실질적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10년 후 우리가 첫번째 매킨토시를 구상할때 그것들은 고스란히 빛을 발했습니다. 우리가 설계한 매킨토시에 그 기능을 모두 집어넣었으니까요. 그것은 아름다운 서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였습니다. 만약 제가 그 서체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매킨토시의 복수서체 기능이나 자동자간 맞춤 기능은 없었을 것이고, 맥을 따라한 윈도우도 그런 기능이 없었을 것이고 결국 개인용 컴퓨터에는 이런 기능이 탑재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학교를 자퇴하지 않았다면 서체 수업을 듣지 못했을 것이고 PC에는 오늘날처럼 뛰어난 글씨체가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제가 대학에 있을 때는 그 순간들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달리 말하자면, 지금 여러분은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현재와 과거의 사건들만을 연관시켜 볼 수 있을 뿐이죠.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현재가 미래와 어떻게든 연결된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배짱, 운명, 인생, 카르마 등 그 무엇이든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현재가 미래로 연결된다는 믿음이 여러분의 가슴을 따라 살아갈 자신감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험한 길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생의 모든 차이를 빚어냅니다.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두번째 이야기는 사랑과 상실에 관한 것입니다.

I was lucky —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저는 운좋게도 인생에서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일찍 발견했습니다. 워즌(스티브 워즈니악)와 제가 부모님 차고에서 애플사를 세운 것은 제가 20세 때 일입니다. 차고에서 2명으로 시작한 애플은 열심히 일한 덕분에 10년 후에 4000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2백억달러짜리 기업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최고의 작품, 매킨토시를 출시했고 저는 30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곧 저는 해고당했습니다. 어떻게 자기 회사에서 해고당할 수 있냐구요? 당시 애플이 점점 성장하면서 저는 저와 함께 회사를 경영할 유능한 경영자를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1년정도는 그런대로 잘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의 비전은 서로 어긋나기 시작했고 결국 우리 둘 사이도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우리 회사의 경영진들은 존 스컬리의 편을 들었고 저는 30살에 쫓겨나야만 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공공연하게 말이죠. 저는 인생의 촛점을 잃어버렸고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전 정말 말 그대로, 몇 개월 동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선배 벤처세대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 같았습니다. 제게 넘겨진 바톤을 놓쳐버린 것 같았습니다. 데이비드 패커드(hp공동창업자)와 밥 노이스(인텔 공동창업자)를 만나 이렇게까지 실패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자 했습니다. 저는 실패의 본보기였고 실리콘 밸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제 맘속에는 뭔가 천천히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전 여전히 제가 했던 일을 사랑했습니다. 애플에서 겪었던 일들조차도 그런 마음들을 꺾지 못했습니다. 전 해고당했지만 여전히 일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당시에는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당한 것은 제 인생 최고의 사건이었습니다. 성공이란 중압감 대신 찾아온 초심자의 가벼움, 불확실성, 내 인생의 최고의 창의력을 발휘하는 시기로 갈수 있게 됐습니다.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 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r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이후 5년동안 저는 'NeXT'와 'Pixar'를 세우고 지금 아내가 되어준 여성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Pixar는 세계 최초의 3D 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를 시작으로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되었습니다. 세기의 사건으로 평가되는 애플의 NeXT 인수와 저의 애플로 복귀후 NeXT 시절 개발했던 기술들은 현재 애플의 르네상스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로렌과 저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애플에서 해고당하지 않았다면 이 많을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입에 쓴 약이었지만 제게는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때로는 인생이 배신하더라도 결코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저를 계속 움직이게 했던 힘은 제 일을 사랑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일을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연인이 여러분에게 의미하는 것처럼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은 여러분 삶의 많은 부분을 채울 것이고 여러분이 위대하다고 믿는 그 일을 하는 것만이 진정한 만족을 줄 것입니다. 위업을 달성하는 것은 당신의 일을 사랑하는 것 뿐입니다. 그 일을 아직 찾지 못했다면 계속 찾으세요. 현실에 안주하지 마십시오. 전심을 다해서 찾아내면 그때는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모든 위대한 관계들이 그러한 것처럼 시간이 갈수록 더 나아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속 추구하십시오. 안주하지 마십시오.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세번째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17살때 이런 경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매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의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 글에 감명받은 저는 그 이후로 지난 33년간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제 자신에게 묻곤 했습니다. '오늘이 내 인생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 며칠 연속 'No'라는 답을 얻을 때마다 나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Because almost everything —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곧 죽는다'는 생각은 인생의 결단을 내릴 때마다 가장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모든 외부의 기대, 자부심, 수치스러움과 실패의 두려움은 '죽음' 앞에선 모두 떨어져나가고 오직 진실로 중요한 것들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길입니다. 여러분은 죽을 몸입니다. 그러므로 가슴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저는 1년 전쯤 암진단을 받았습니다. 아침 7시반에 검사를 받았는데 췌장에 악성 종양이 보였습니다. 그때까진 췌장이 뭔지도 몰랐죠. 의사들은 거의 치료할 수 없는 종류의 암이라고 했습니다. 또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밖에 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주치의는 집으로 돌아가 신변정리를 하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라는 뜻이었죠. 그것은 내 아이들에게 10년동안 해줄 것을 단 몇달 안에 다 해내야 된다는 말이었고 가족들이 임종할 때 쉬워지도록 매사를 정리하란 말이었고 작별인사를 준비하라는 말이었습니다.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그렇게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저녁 조직검사를 받았는데 위장을 지나 장까지 내시경을 넣어 췌장에서 암세포를 채취하는 조직검사였습니다. 저는 마취상태였는데 후에 아내가 말해주길 의사들이 현미경으로 세포를 분석하면서 갑자기 울먹거리기 시작했답니다. 수술로 치료가 가능한 매우 희귀한 종류의 췌장암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수술을 받았고 감사하게도 지금은 완치되었습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그때 만큼 제가 죽음에 가까이 가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수십년간은 그렇게 가지 않길 바랍니다. 이런 경험을 해보니 죽음이 때론 유용하단 것을 머리로만 알고 있을 때보다 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아무도 죽길 원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싶다는 사람들 조차도 죽어서까지 가고 싶어하진 않죠. 그리고 여전히 죽음은 우리 모두의 숙명입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죠. 그리고 그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이 '죽음'이니까요. 죽음은 삶을 대신하여 변화를 만듭니다. 지금 이순간 여러분이 곧 신세대입니다. 그러나 머지 않아서 여러분도 구세대가 되어 사라져 갈 것입니다. 너무 극적으로 들렸다면 죄송하지만 엄연한 사실입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여러분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타인의 생각의 결과물에 불과한 도그마에 빠지지 마십시오. 타인의 견해가 여러분 내면의 목소리를 삼키지 못하게 하세요.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슴과 영감을 따르는 용기를 내는 것입니다. 이미 여러분의 가슴과 영감은 여러분이 되고자 하는 바를 알고 있습니다. 그외의 모든 것은 부차적인 것이죠.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제가 어렸을 때 '지구백과'라고 하는 놀라운 책이 있었는데 저희 세대에게는 바이블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멀로 파크에 사는 스튜어트 브랜드란 사람이 쓴 책인데 시적 감각으로 살아있는 책이었지요. PC나 전자출판이 존재하기 전인 1960년대 후반이었기 때문에 타자기, 가위, 폴라로이드로 제작된 책이었습니다. 구글이 등장하기 35년 전 책으로 구글 같은 거였죠. 그책은 위대한 의지와 아주 간단한 도구만으로 만들어진 역작이었습니다.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스튜어트와 친구들은 몇번의 개정판을 내놓았고, 수명이 다할 때쯤에 최종판을 내놓았습니다. 그때가 70년대 중반, 제가 여러분 나이였죠. 최종판 뒤쪽 표지에는 이른 아침 시골길 사진이 있었는데 겁없는 사람이나 히치하이킹 할 수 있는 풍경입니다. 그 사진 밑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계속 갈망하라 여전히 우직하게(Stay Hungry Stay Foolish)'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작별인사였습니다. '계속 갈망하라 여전히 우직하게' 제 자신에게도 항상 그러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리고 지금, 새로운 시작을 위해 졸업을 하는 여러분에게 같은 바람을 가집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Thank you all very mu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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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o_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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